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심기자의 역사이야기-⑬ 고려는 왜 멸망했을까?

개국 제11회 위화도 회군/회군하지 않고 진군했다면?  

드디어 위화도 회군이 시작됐다! 이성계, 조민수군은 말머리를 돌려 개경으로 치달았다. 하지만 이성계의 머릿속은 가족들에 대한 걱정들로 가득했다.

– 지란아, 방원이한테는 이미 연락이 닿았겠지?

– 성님, 걱정마시오. 이미 방원이가 움직였을게요.

– 이제 최영쪽에서도 소식이 들어갔을 게다. 그 보다 빨리 움직여야 할텐데…

개경 이성계의 집. 이방원이 다급히 찾아왔다.

– 어머님, 저 방원입니다. 빨리 채비를 서두르셔야 합니다.

이성계에게는 두 부인이 있었다. 이성계의 향처 한씨와 경처 강씨가 있다. 이성계의 경처는 훗날 조선 초대왕후가 되는 신덕왕후 강씨고 방원에게는 계모가 된다. 한씨는 이방원의 생모다.

– 그래, 방원아! 어서 서두르자구나.

한씨가 말했다.

– 방번이와 방석이는 어딨습니까?

이방원이 강씨에게 물었다.

– 이제 곧 나올게다.

이성계의 회군 소식은 곧장 고려 조정에도 알려졌다. 최영은 깜짝 놀랐다.

– 뭣이! 이성계가 회군을…어서 도성에 있는 그의 가족들을 붙잡아 오라!

– 문하시중 대감! 이성계 가족들이 집에서 벌써 사라졌습니다!

– 이런, 이런!! 어서 수색해라. 도성밖을 벗어나지 못하게 하란 말이다!

최영은 문득 이인임과의 대화가 머릿속을 스쳐갔다.

– 이보시오, 최공! 이성계 너무 믿지 마시오. 왜 자꾸 그를 지켜주고 두둔하는게요. 그는 다른 생각을 가지고 있소. 우리랑은 다르단 말요. 그자는 같은 고려하늘에서 살 수 없는 인물이란 말이외다.

개경에서 군사들이 분주하게 움직이기 시작했다. 도성방비와 동시에 군사들은 이성계의 가족을 찾기 위해 혈안이 돼 있었다. 그러나 이방원과 이성계의 가족들은 도성을 빠져나와 말을 달려 그들에게 가장 안전한 동북면으로 향하고 있었다.

이성계와 조민수의 군사들은 회군소식에 사기가 이미 충천했다. 서경에서 위화도까지의 행군속도는 하루평균 시속 12km에서 20km였는데 반해, 위화도에서 개경까지 향하는 속도는 하루평균 시속 40km에 이르렀다.

만약 회군하지 않고 진군했다면?

이 부분을 접할 땐 현대인들은 많이 아쉬워한다. 이 때 요동을 점령해서 고구려 영토를 수복 했어야 했는데 그러지 못했다는 것이다. 공격해서 싸움에서 이기는 것과 점령은 다른 문제다. 위화도 회군의 원인이 되는 요동정벌은 2차 요동정벌로 1차때 이미 이성계가 요동을 정벌하여 승리까지 거머쥐었다.

그러나 군대를 주둔시키고 그 지역을 우리의 땅으로 만드는 것은 또 하나의 난관이다. 주민들을 이주시켜야 하고, 주둔된 군대가 점령할 수 있도록 보급이 끊임없이 이뤄져야 한다. 당시 어려움에 처한 고려의 재정상태로는 당해낼 수가 없었다.

역사에 가정은 없다지만 그래도 가정하면서 우리식대로 상상하고 위안을 삼기도 한다. 가정하고 상상하는 것은 나쁜 일은 아니라고 본다. 그러나 우리입장에서만 생각해서는 안된다. 요동을 정벌해서 점령했다고 가정해도 또다른 어려운 상황은 존재한다.

먼저 당시 명나라 황제 주원장은 중국역사상 입지전적인 인물이다. 역사적으로 중국을 얻기 위해서는 서쪽에서 시작하거나 북쪽에서 시작해서 통일을 이룬 것이 대부분이다. 이는 중국 근현대사 국공내전때도 적용됐다. 중국 공산당도 북쪽에서 시작해서 국민당을 몰아내고 중국을 손에 쥐었다. 그런데 딱 한가지 예외적인 이가 주원장이다. 남쪽에서 시작해 세계 초강대국 원나라를 북으로 밀어내고 중국을 한족의 나라로 통일했다. 따라서 그의 능력으로 본다면 고려가 명나라와의 요동전쟁으로 승리를 장담하기는 어렵다. 명나라가 내부사정으로 당시 만주에 신경을 쓸 수 없었다고 해도 중국은 만주를 중요하게 생각한다. 즉 다시 정벌할 수 있다는 뜻이다.

고려가 당시 요동을 장악해서 점령까지 했다고 가정해 보면, 그 후 명은 보고만 있었겠는가. 그의 아들 주체, 성조 영락제는 고려의 요동점령을 가만히 두지 않았을 것이다. 그의 재위시절 명나라는 최고 전성기를 누리며 그 또한 중국 역사에서 고구려를 침공한 당태종과 비견될 만큼 성군으로 불린다. 그가 바다항로까지 개척한 것을 보면 요동을 차지한 고려를 순순히 보고만 있지는 않았을 것이다. 주원장 시절 명의 수도는 난징이었으나 영락제 시절의 명의 수도는 지금의 북경이다. 고려로 들어오기도 수도 난징시절보다 훨씬 쉽다.

중국은 만주를 중요하게 생각한다. 그래서 만주지역에 나라가 들어서는 것을 정말 싫어한다. 이는 중국 삼국지 시절부터의 기록을 보면 알 수 있다. 분열기에 있었음에도 위나라는 고구려를 침략한다. 위나라 관구검 장군이 고구려를 침략하여 승리했다는 기록은 우리는 이미 알고 있다. 그 후 중국은 수나라, 당나라, 거란까지 끊임없이 요동을 지배 혹은 제압하기 위해 군대를 보냈다.

만주지역에서 시작했던 12세기의 금나라, 17세기의 후금 그리고 청나라, 이들은 만주지역에서 힘을 키워 중국을 일부 혹은 전체를 정복했던 왕조다. 이 사실 하나만 가지고 본다면 만주지역에 나라가 세워지는 것을 극히 꺼려한다는 것을 알 수 있지만 다른 티베트 지역도 아니고 왜 만주지역 이어야 하는지 살펴볼 필요가 있다.

중국은 땅이 드넓어서 중국땅을 장악하기 위해서는 상당히 많은 군대가 필요할 것으로 생각되지만 사실은 그렇지 않다. 중국에 30여개의 성이 있다고 가정해보자. 그래서 이들을 장악하면 그들이 소위 말하는 천하통일을 할 수 있다고 생각해보자. 30여개의 성을 장악하기 위해서는 적어도 20여개 성을 장악할 수 있는 군대가 필요하다고 생각할 수 있다. 그러나 지금처럼 현대식무기, 교통통신수단이 발달하지 않던 시절 중국에서는 2개성만 장악해도 중국전체가 위험해지기 시작한다.

한 개 성에 반란이 일어나 장악되면, 반란을 진압하기 위해 나머지 29개 성에서 군대를 파견하지 않는다. 실제로 2~3개 성정도의 군대가 반란진압을 위해 동원된다. 그런데 한 성에서 반란을 일으키고 반란군이 그 성을 지키면서 싸운다면 2~3개 성의 군대규모는 충분히 이길 수 있다. 그리고 반란군이 또다른 성을 장악하여 2개 성을 가지고 있으면, 6개 성에서 군대를 동원하기가 불가능한 것이 과거 중국대륙의 실정이다. 교통통신의 장애도 있고, 지금도 그렇지만 중국은 여러나라들과 국경을 접하고 있다. 당시에는 유목민족들이 중국땅을 노리고 있기 때문에 함부로 군대를 빼서 이동하기가 대단히 어렵다.

만주는 중국의 3개 성정도의 크기다. 지금도 대련, 여순은 중국 최대 철강단지다. 요동지역에 위치하고 있으며, 이곳은 철뿐만 아니라 석탄, 말도 생산 가능하다. 따라서 우리나라 삼국시대때, 이 지역을 장악한 고구려는 철기병으로 악명을 떨치기도 했다. 결국 만주를 장악하면 중국전체가 위험해진다. 그래서 중국 한나라때부터 수, 당 그 후대에 이르기까지 끊임없이 만주를 지배하거나 제압하려했던 것이다. 지금도 만주가 통일되면 중국은 진다는 인식이 뿌리깊이 작용하고 있다.  

만주를 장악하면 중국을 차지한다는 생각은 결국 20세기 일본에까지 영향을 미친다. 일본은 한반도를 합병하고 만주를 장악, 중일전쟁을 일으키면서 중국본토로 진입한다. 그리고 당시 중국군은 연전연패를 거듭하며, 당시 수도인 난징까지 내주게 된다.

이러한 중국의 역사적 경험들이 오늘날 동북공정에까지 이어지게 된 것이다.

한편, 이성계 요동정벌군은 위화도까지 가는데 20일이 걸렸으나, 회군으로 개경까지 10일만에 도착했다. 그와 5만의 군사들은 이미 도성앞까지 와 있었다.

<다음회에 계속>